생애

출생과 성장기

1947년 2월 14일 김근태는 경기도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12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 교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3차례 초등학교를 옮기다 양평의 양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광신중학교에 수석으로 들어갔고, 그 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위로 6명의 형·누나는 어릴 때 숨지고 그 다음 세 형은 6·25전쟁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김근태가 중학교 3학년 때, 516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부친은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심장판막증에 걸려 곧 세상을 떠나셨다. 갑자기 닥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어머니께선 편찮은 몸으로 동대문 시장에서 스타킹과 양말을 떼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김근태는 “그때의 어머님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있다.”고 회고했다.

 

대학과 고난의 민주화운동 대장정

1965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1967년 상대 대의원회 의장이 된 김근태는 그 해 8월 대통령부정선거 규탄시위로 경찰서에 끌려가 무지막지한 매를 맞고 제적된 뒤 강제징집을 당한다.
1970년 제대 후 복학해서도 민주화 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조영래, 장기표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라는 별명이 생겼다. 1971년 2월 유신독재에 저항한 서울대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내란음모)로 첫 번째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변형윤 학장의 결단으로 복교조치가 됐고, 1972년 2월 피신상태에서도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유신독재,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던 피신 세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 음모와 유신독재의 영구집권 음모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었고, 1975년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 없는 학생시위·집회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되는 등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7년 넘게 끝이 보이지 않는 피신생활을 해야만 했다.
1970년대 어느 겨울 밤, 은신처를 구하지 못한 김근태는 통금시간을 넘겨 서울 도곡동의 갈대밭에서 제자리뛰기로 찬바람과 맞서며 밤을 지새웠다. 김근태는 그 때를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떨굴 수가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슬며시 먹빛으로 변하고, 먹빛 하늘이 청동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결국 저에게 아침은 왔다.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고문과 투옥으로 점철된 혹독한 80년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분노와 공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김근태에게는 매 맞고 감옥에 내동댕이쳐지는 혹독한 세월이었다. 1983년 9월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두려움을 무릅쓰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최초의 독자적·공개적 사회운동단체였다. 민청련은 기관지인 ‘민주화의 길’을 펴내 군부독재의 폭력적 본질을 폭로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이론적 지침을 제공하면서 각종 정치투쟁을 조직하는 등 선도적 투쟁을 벌렸다.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최초로 광주민주항쟁의 기념식을 개최하고, 518 민주묘역을 참배하는 과감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남영동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문을 당했다. 1985년 8월 24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되어 9월4일부터 26일까지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8번의 전기고문, 2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1987년 6월항쟁을 교도소에서 맞이했다. 그해 대통령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 실패로 패배했다. 1988년 6월 30일 수감생활 2년 10개월 만에 여소야대의 13대 국회가 출범한 후 겨우 석방되었다.
1988년 후반, 당시까지의 모든 민주세력이 총결집한 민주운동 조직인 전민련을 결성,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민주화와 인권옹호,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1990년 3당 통합 반대 시위가 잇따르자 노태우 정권은 전민련 결성선언문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다시 1990년 5월부터 1992년 8월까지 2년 3개월 동안 김근태를 옥살이 시켰다.김근태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2차례 투옥으로 5년 6개월의 수감생활과 26차례의 체포, 7차례의 구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암흑과 같은 세상에서 벗이 된 인재근

1977년 8월 도피 중이던 김근태는 평생 반려자이자 동지인 인재근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인재근은 이화여대 출신으로 당시 부평 봉제공장에 위장 취업해 있었다. 김근태는 광나루 선상 매운탕 집에서 “나랑 결혼하지 않으면 어디든 도끼를 들고 쫓아가겠다.”고 협박성 구혼을 했고 성공했다. 결국 김근태의 ‘바깥사람’(감옥에 있던 남편을 바깥에서 도왔으므로)이자 동지가 된 인재근은 훗날 “청혼에 기분이 좋았지만 그 후 평생 가장 많이 쓴 말이 ‘양심수 석방’이었다”고 술회했다.
1985년 인재근 여사는 김근태 민청련 의장에 대한 남영동 고문사실을 가수 이미자 노래 테이프 중간에 녹음하여 미주 한국일보 기자 심기섭을 통해 미국언론과 인권단체들에 폭로하였다. 뉴욕타임즈는 크게 기사화했고, 세계 인권단체들은 강력한 항의를 한국 정부에 전하였다. 이후 김근태 인재근 부부는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1987)을 공동수상하였고, 독일의 함부르크 재단은 김근태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1988)하였다.

 

정치입문의 결단과 정권교체의 일익을 담당

1995년 김근태는 민주당 부총재로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그 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하며 부총재를 맡았다. 수평적 정권교체의 실현을 위해 신망 있는 재야인사들을 이끌고 야권 통합에 참여함으로써 공식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해온 세력, 민주정통세력이 집권하는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절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수도권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과 파랑새 유세단 단장을 맡아 정권교체의 일익을 담당했다.
김근태는 15대 총선 직전까지 복권되지 않아 출마가 불투명했다. 공안기관과 정보기관은 새정치국민회의에 참가한 김근태에게 복권을 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였다. 1995년 10월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에드워드 케네디는 강력하게 김근태의 복권을 요청하였고, 김영삼 대통령은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15대 총선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후 17대 총선까지 3선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를 위한 양심 고백

2002년 김근태는 16대 대선에 도전했다. 당시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2년 3월 2000년 8월 민주당최고의원 경선비용을 공개하고 불법정치자금의 관행을 바로잡고자 양심고백을 했다. 김근태는 역풍을 맞아 민주당 대통령 경선후보를 사퇴하게 되었으며 검찰의 기소를 받게 되었다.
한편, 정치자금 양심고백을 민주당 대통령 경선을 비롯한 2002년 대선 등의 선거문화가 실질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를 만들어 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분들이 검찰 기소의 철회를 주장하였고 재판과정에서 격려해주었다. 결국 2003년 12월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를 선고받음으로써 김근태의 양심고백은 정치자금 투명화와 깨끗한 정치의 기념비적 사건이 되었다.

 

영원한 민주주의자 김근태

2007년 파킨슨병 확진을 받았다. 어눌한 말투, 불편한 거동, 굽은 어깨 등 고문 후유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고문으로 생긴 트라우마(PTSD,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병원에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전신 마취를 위해 눕거나 치과 치료용 드릴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고문에 대한 기억이 다시 살아날 정도였다. 큰 소리로 연설을 하기도 버거웠다.
2011년 12월 30일 뇌정맥 혈전증으로 치료를 받다 합병증이 겹쳐 패혈증으로 운명했다. 5일간 사회장을 마친 후 1월 3일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김근태는 서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통해, “2012년을 점령하라!” 고 유언했다.

[출생과 성장기]

[대학과 고난의 민주화운동 대장정]

[고문과 투옥으로 점철된 혹독한 80년대]

민주화운동

[암흑과 같은 세상에서 벗이 된 인재근]

[정치입문의 결단과 정권교체]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를 위한 양심 고백]

영정사진

연보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 출생

1959년 2월 경기도 양평 양수초등학교 졸업

1962년 2월 서울 광신중학교 졸업

1965년 2월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5년 2월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입학

1967년 육군 보병 입대

1970년 8월 육군 병장 제대

1972년 2월 서울대 졸업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2대의장

1990년~1992년 전민련 활동으로 구속

1994년 통일시대민주주의 국민회의 공동대표

1995년 민주당 입당, 민주당 부총재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2003년 10월 27일 열린 우리당 원내대표

2004년 7월 1일 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 취임

2006년 6월 10일 열린우리당 의장 취임

2012년 6월 제2회 진실의 힘 인권상 수상

관련서적

2014.06.26. 《짐승의 시간》, 보리

2013.12.13. 《진실은 힘이 세다》, 꿈꾸는 꼬리연

2012.12.24. 《김근태 당신이 옳았습니다》, 호미

2012.12.26. 《당신이 옳았습니다-김근태 이야기》, 북멘토

2012.12.03. 《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 현암사

2012.11.22.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이야기공작소

2012.11.12.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푸른숲

2007.06.21. 《일요일에 쓰는 편지》, 샛별디앤피

2007.03.01. 《허물어진 국가의 재창조》, 한울

2004.09.30. 《남영동 5층 15호실》, GT클럽 희망

2004.03.25.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올벼

2001.10.15. 《희망은 힘이 세다》, 다우

1996.03.01. 《너의 그림 속에서 태양을 보며》, 한울

1995.06.01. 《희망의 근거》, 당대

1992.06.01 《열린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한울

1992.05.01. 《우리 가는 이 길은》, 새날

1987.09.01. 《이제 다시 일어나》, 중원문화사

1984.09.01. 《남영동》, 중원문화사

2012.11.22.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이야기공작소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어록

정치 및 경제분야 관련 발언

“내가 정치자금 문제를 처음 고백할 때만 해도 왜 도움을 준 사람을 파느냐고들 했지만, 썩은 상태로 정권교체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정치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 자신부터 고백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 2003년, 정치자금 고백 공판 직후 기자단의 질문에 대해

 

“원칙과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해지도록 만드는 야만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꿈과 이상을 지키려고 하면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왕따 당하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정의와 진실, 희망은 거처를 잃게 됩니다.”

– 2003년, 정치자금 고백, 공판발언 중에서

 

“나는 이은주 또래의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의 젊은이들, 여러분을 정말로 깊이 사랑한다고, 여러분의 속 깊은 고민을 들을 수 있는 친구로 선택되고 싶다고, 이렇게 간절하게 말하고 싶다.”

– 2005년, 여배우 이은주의 죽음에 대한 신문 기고

 

당정, 당청 간에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공공주택 분양가 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여 결론을 도출할 때, 여타의 다른 문제들을 쉽게 갈 수 있다.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 그리고 나서 질서를 고려하자…….

공공주택 분양원가 공개에 대해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민과 약속한 공공주택 분양원가 공개에 대해 여전히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 2004년 6월 참여정부의 분양원가 공개불가에 대한 성명 중에서

 

“국민을 부엉이 바위로 내몰아선 안된다”

2009-06-02 16:04:14 노무현 서거시, 성명

 

“1998년도에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취임사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배정되었다. 거기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두 수레바퀴로 합의를 구하자’는 주장을 당선자가 했는데, 당선자가 없는 자리에서 ‘민주주의와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혼자 주장하다 물러서고 말았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불안전성 이런 것을 다른 수레바퀴인 민주주의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즉, 시장이 가진 폭력성을 경제시스템 내에서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민주적 시장경제다”.

2011.07.프레시안 자유인인터뷰, 민주적 시장경제 관련대목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팜플렛)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희망에 의해 결정된다. _ 2001

 

저항할 수 있어야 꿈꿀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작은 일들을 위해 많은 것을 걸었던 것이다. _ 1997

 

희생의 계곡이 깊기 때문에 우리의 꿈과 영혼은 정말로 드높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꿈을 꾸면서, 나는 이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다. _ 1995

 

거대한 암벽을 기어오르는 자가 결코 추락의 공포에 떨지 않고 작은 바위 틈 하나 놓치지 않고 딛고 오르듯이 민주화 운동에 나선 우리는 아무리 작아 보이는 계기라 할지라도 적극적인 자세로 운동 발전의 디딤돌로 살아야 한다. _ 1984

 

어렵고 힘든 결정을 해야 할 때 나는 먼저 간 이들과 이름 없는 지원자들을 떠올린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염원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_ 1997

 

나는 정직과 진실이 이르는 길을 국민과 함께 가고 싶다. _ 2001

 

거짓은 거짓을 낳을 뿐이지만, 정직은 미래를 낳는다. 정직하고 성실한 99%의 사람들이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_ 2001

 

정치가 현실일 뿐이라면 개선과 개혁은 어떻게 가능하며 왜 우리가 피 흘리며 군사독재와 싸워야 했는가? _ 2003

 

분단국가이자, 정전협정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는 ‘평화가 곧 밥’이다. 평화가 깨지면 경제가 흔들린다. 밥그릇이 깨지는 것이다. _ 2006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다. 거짓희망이다. 절망한 마음에는 희망의 불씨를 피울 수 있지만, 거짓희망을 품으면 다시는 희망의 불씨를 피울 수 없다. _ 2007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아닌 상호 존중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말 그대로 G2의 책임과 역량을 동아시아에서 건설적으로 기여하는 방안과 과정을 만들어낼 리더십이다. 또 6자 회담을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동아시아 협력에 기여할 수 있는 리더십, 이러한 비전을 갖고 이해하고 그 필요성을 채울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_ 2001

 

민주화를 위한 변하지 않는 믿음과 희망이 우리를 여기에 있게 했다. 꿈이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됐다. _ 1997

 

만약 우리가 꿈과 영혼을 포기한다면 우리 사회는 결국 형편없는 사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_ 1992

 

희망을 의심할 줄 아는 진지함,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성실함, 대안이 없음을 고백하는 용기, 추상적인 도덕이 아닌 현실적 차선을 선택해가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_ 1995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_ 2011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의장 김근태 1차 공판 기록 중(남영동, 116page)

- 1985. 12. 19.(목) 오전 10시, 서울 지방법원 118호 법정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진실이 밝혀지고 사법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가해졌던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이러한 고민주 조사되고 색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근태 학술연구

“대한민국 현대 민주주의에서 김근태의 위상을 세우는 일은 비록, 그가 집권의 꿈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궤를 같이 할뿐만 아니라 이들 정부의 역사적 출현의 밀알이 되었다.
정치의 영역에서 ‘민주대연합론’으로, 경제의 영역에서 ‘경제인간화’로 대변되는
김근태의 사회운동가로서 또는 정치가로서의 선각적 주장을 時代史적이고, 학술적으로
탐구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민주주의의 첫 걸음을 내딛는 우리의 소명이요 디딤돌일 것이다.”

김근태 민주주의

 

민주대연합론자 김근태 민주혁명을 민주대연합의 이론적 설계와 정치과업의 수행

반신자유주의와 경제인간화를 위한 2민주대연합

김근태의 민주주의, ‘11권의 민주주의경제의 인간화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의미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국가폭력의 희생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고문과 인권탄압, 수배와 도피, 그러나 그에게 행해진 폭력이 비단 국가에서만 비롯되었을까? 권력과 권력에 동원된 억압적 국가기구와 고문경관만이 김근태에게 부끄러울까? 아니다. 그가 고생하는 동안 세상의무관심도 그에게는 더 큰 폭력이었을 것이다. 그런 김근태의 민주화 운동과 정치가로서의 삶은 달랐다. 그가 국가로부터 당한 폭력의 방식을 철저히 배재했다. 다수의 뜻을 따르지만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고, 천천히 가더라도 낙오된 없기를 희망하면서, 절대 악에 대해서는 앞서 싸웠고, 희생했다. 그래서 김근태는 민주주의를 이루기위한 방도로서 민주대연합을 구상하고 제안한다. 대연합은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할 때 시너지와 폭발력이 있다. 김근태는 그렇게 했다. 전략으로서 대연합을 제시하고 자신의 희생을 통해 대연합의 폭발력을 높였다. 매번의 역사적 고비에서 김근태의 선택은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대연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참 모습이요 민주주의 힘임을 역사적으로 입증했다. 그래서 김근태를 민주주의자라 부른다.

 

김근태의 경제인간화

 

따듯한 시장경, 시장을 사탄의 맷돌로 놓아두면 안 된다.

민주주의와 시자경제가 아닌 민주적 시장경제론의 꿈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동반성장, 신자유주의는 한국경제의 대안모델이 아니다.

small U.S.A가 아닌, big Sweden 슬로건

민주화가 밥 먹여주나? ‘민주화만이 밥먹여 준다.’

평화가 밥이다

김근태의 人間愛